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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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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시작하자 2023. 11. 1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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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최수종 씨 주연의 고려거란전쟁이라는 대하드라마가 시작되는데, 주연배우인 최수종 씨가 맡은 강감찬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강감찬 장군의 낙성대, 고려시대 주요인물과 업적 및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까지 골고루 정리를 하였습니다.

ㅁ 강감찬 장군의 낙성대

현 낙성대의 강감찬 장군의 모습

  • 강감찬 장군 출생 : 948년 12월 27일
  • 강감찬 장군 출생지 : 금주 낙성대 (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 강감찬 장군 사망 : 1031년 9월 15일

지하철 2호선의 낙성대는 고려시대의 명장인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이며,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이 태어나던 날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 따라 별이 떨어진 터라는 뜻으로 낙성대라고 이름하였으며, 화강암으로 된 삼층석탑은 13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높이는 4.48m입니다.

ㅁ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을 소개하기 이전에 일단 고려시대를 먼저 알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고려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 약 474년간 한반도를 지배하였으며, 고려, 후백제, 신라로 나뉘어 대치하던 후삼국시대를 왕건이 936년에 통일했으며, 따라서 918년부터 936년간의 18년은 엄밀히 말해 후삼국시대로 불립니다. 1392년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 456년간의 고려시대가 있었습니다.

ㅁ 고려시대 주요 인물

1. 왕건

왕건은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한 인물로, 원래는 송악(개경) 지방의 호족(지방 귀족) 출신이었으나, 후고구려를 세운 임금인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인물입니다. 이후, 신라와 후백제를 정복하여 한반도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으며 불교 장려 정책 등으로 나라를 안정시켰습니다.

2. 광종

광종은 고려의 4대 임금으로 925년 태조 왕건의 아들로 태어나 949년에 임금이 되었으며, 그는 왕건의 혼인정책으로 인해 세력이 커진 호족들의 힘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 등의 개혁 정치를 실시한 왕이기도 합니다.

3. 강감찬

아래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고려시대를 통틀어 가장 유명했던 문신이자 장수로서, 거란이 고려에 침입했을 때,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 귀주 대첩에서 승리를 하였으며, 943년 금주(낙성대)에서 태어나 고려군의 총사령관뿐만 아니라 문하시중 등의 벼슬을 지내다 103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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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부식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의 유학자로서, 1075년 신라 왕실의 후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고려에서 이름난 문벌귀족이 되었습니다. 1135년에 일어난 묘청의 난을 진압하여 최고 벼슬에 올랐으며, 정치에서 물러난 뒤 삼국사기를 지었습니다.

5. 최영

고려말 장군이자 재상으로서, 기울어가는 고려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전쟁터에 나가면 항상 승리를 거두는 명장이었습니다. 전라도 해안으로 쳐들어온 왜선 400척을 격파했으며, 고려의 북쪽 국경을 침입한 홍건적을 물리치며 고려말 최고의 장군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6. 금속활자, 직지심체요절, 팔만대장경

그 외에 고려시대의 대표유물로서는 금속으로 만든 활자이자 무쇠로 만든 철활자가 있으며, 주석으로 만든 연활자 및 놋쇠로 만든 동활자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때부터 금속활자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금속 활자로 만든 인쇄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직지심체요절'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 세계에 남아있는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때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불교 경전을 새긴 나무판으로서, 부처의 힘으로 고려에 침입한 몽골군을 물리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만들었습니다. 해인사 장경판전과 함께 국보 제12호로 지정되었고, 2007년 6월에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ㅁ 강감찬 장군

  • 강감찬 장군 출생 : 948년 12월 27일
  • 강감찬 장군 출생지 : 금주 낙성대 (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 강감찬 장군 사망 : 1031년 9월 15일

948년에 태어나 1031년까지 83세까지 살았으며, 동아시아 역사 전체에 영향을 미친 구국영웅이자, 고려의 리즈시절을 이끈 현종의 치세에 큰 도움을 준 명재상이었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 장군 등과 비견되는 명장으로 칭받기도 합니다. 강감찬 장군은 최영, 정몽주, 서희와 더불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위인입니다. 강감찬 하면 주로 거란을 물리친 장군으로 알려져 무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나중에 문하시중에 오른 문관이었습니다. 진주 강씨중 인헌공파의 파조이기도 합니다. 

강감찬의 어린 시절 이름은 강은천이었습니다. 강감찬이라는 이름은 과거 급제 이후 개명한 이름으로,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일조한 장군이었으며, 고려사 열정에 의하면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고 합니다. 36세의 나이에 과거를 급제한 후, 관직 생활을 늦게 시작한 편이기도 했습니다. 

ㅁ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은 1019년 강감찬 장군이 무려 71세 때 총사령관으로 전쟁터에 나갔으며, 21만 명의 고려군이 귀주에서 10만 명의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로, 초기의 기선제압과 유격전, 포위 섬면전 등을 완벽하게 구사하며 승리한 전투입니다. 흔히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이라고도 불립니다. 무려 30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이 뒤엉킨 싸움으로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회전이며, 양측의 규모를 명확히 알 수도 없는 최대규모의 전투 중 하나였습니다. 

거란은 본격적인 고려 침공에 앞서 몇 차례 군사를 압록강 근처로 보내 고려를 위협하기도 하였으며, 1014년 거란은 압록강에 전투태세를 준비하며 조금씩 전투준비를 하였습니다. 즉, 거란족은 고려와의 장기전을 염두에 둔 것으로 파악됩니다. 1014년부터 1018년까지 매년 소규모로 몇백 명씩 작은 전투를 하며 고려군의 태세를 점검하며 고려를 침공할 준비를 하였으며, 1019년 무려 10만 명의 대군을 준비하여, 드디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강감찬은 고려군 20만 명을 이미 준비하였으며, 그중 12,000명의 기병을 차출하여 홍화진 옆 삼교천 계곡에 매복을 시켰습니다. 일반적이라면 성을 중심으로 방어를 했을 것이나, 강감찬은 거란군이 기병위주로 이루어진 데다, 수도 함락을 최우선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미리 예상하고, 이와 같이 병력을 배치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거란족의 계획을 강감찬이 훤히 꿰뚫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려의 예상대로 거란군 10만 명이 고려 방어군을 우회하여 삼교천을 도화 하자, 고려군은 쇠가족으로 막은 둑을 터트림과 동시에 기병대를 출격시켜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둡니다.

사실은 1만 2천 명 vs 10만 명이지만, 나중에 고려군은 병력수를 급증시켜 병력을 급대화하여 거란족을 충격에 빠뜨리며 좌절시키는 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귀주대첩이 끝난 이후, 살아나간 거란족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귀주대첩은 거란족이 더 이상 고려를 침입할 수 없게끔 만든 전투이기도 합니다. 당시 거란군은 세계 최강의 군대였으며, 서역에서부터 만주까지 그들을 당해날 군대는 없었어기에 더욱 짜릿했던 전투였으며, 그런 군대를 맞이하여 고려는 거란군과의 정면대결에서 승리를 한 것이었습니다. 귀주대첩 이후, 고려의 국왕인 현종은 직접 마중 나가 강감찬을 맞이하였으며, 강감찬의 손을 잡고, 금으로 만든 8가지 꽃을 강감찬 머리에 직접 꽂아 주었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영파역을 흥의 역으로 고치기도 하였을 정도로 구국영웅이 되었습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고려는 향후 120년간의 전성기를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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