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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이태신역의 정우성은 장태완 수도경비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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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시작하자 2023. 11. 22.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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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에서 이태신역을 맡은 정우성은 실존 인물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맡았었고요, 1979년 12,12 사태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전두환과 맞서 싸운 인물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 장태완 수도경비 사령관

  • 출생 : 1931년 9월 13일
  • 출생지 :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면
  • 사망 : 2010년 7월 26일
  • 학력 : 조선대학교 법학과 학사 /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1977년) / 조선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 경력 : 1953년까지 3년간 한국 전쟁 참전/ 1968년까지 3년간 베트남 전쟁 참전
  • 직무 : 육군 제26 사단장 / 육군 수도경비사령관 / 한국증권전산 회장 / 민주당 고문 (2001~2010)

장태완 수도경비 사령관은 만 79세로 2010년도에 사망을 하였으며, 육군 제26사단장을 지내다, 1977년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까지 수료한 뒤, 1979년 11월  수도권 육군 수도경비사령관에 올랐으나 한 달 만인 1979년 12.12 군사 쿠테타 시, 신군부 측에 반기를 들다 강제 예편되었습니다. 이후, 12.12 사태가 역사적 재조명을 받으면서 '군인의 표상'으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후, 6개월간 사실상 가택연금 생활을 하다가, 1982년 한국증권전산 회장을 지냈으며, 1994년에는 자유경선에서 재향군인회장에 당선되어 6년간 재향군인회를 이끌었습니다. 2000년 3월에는 민주당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16대 전국구 비례대표 국회의원(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겸 당무위원)을 지냈습니다. 이후, 여당 지도부의 일원으로 일했으며, 2002년에는 노무현 대통령 후부 보훈특보를 지냈으나, 2010년 숙환으로 인해 사망하였습니다. 

장태완은 경북 칠곡에서 3남3년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대구상고를 다니던 중, 6.25가 터지자, 19세의 나이로 육군종합학교(11기)에 지원하여 사선을 넘겨 됩니다. 이후, 육군대학 졸업논문으로 보안사령부 해체를 주장했다가 베트남 참전 때 '사상 불순자'로 찍히기도 했습니다. 1971년 1월 별을 단 그는 수경사 참모장과 26 사단장을 거쳐 10.26 직 후, 수경사령관이 되었으나, 취임 한 달 만에 12.12사태가 터졌고, 장태완은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이기지 못할 싸움임을 알면서도 군인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진압에 나섰습니다. 장태완이 전두환을 포함한 하나회 소속 장교들에게 '야 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 니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지금 당장 전차를 몰고 가서, 네놈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 버리겠어! 하는 모습이 MBC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재연되었습니다.

 

그 후, 장태완은 진압책임을 맡은 내가 백기를 들 수는 없었고, 죽기로 결심하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회고록에 써져 있으며, 결국 신군부 진압에 실패한 장태완은 보안사령부에 체포되어, 서빙고 분실에서 두달간의 조사를 받고, 고문을 받은 후 풀려났으나, 30년간 입었던 군복을 벗어야 했고, 그 후 2년간 가택연금을 당해야 했습니다. 당시 TV뉴스를 통해 보안사에 끌려가는 모습을 본 시골의 아버지는 매일 막걸리를 마시다가 1980년 4월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이후, 1982년 2월에는 서울대에 갓 입학한 외동아들이 할아버지의 산소 근처인 낙동강변에서 꽁꽁 얼어붙은 시신으로 숨진채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전두환 정권이 12.12 사태 이후, 장태완에게 직접 해를 가하지 못할 것 같으니, 아들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당시에는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전두환 정권에서 경찰과 검찰에 압력을 넣어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라 추측이 되네요.ㅜㅜ

이후, 숨죽인 채 통한의 삶을 살아온 장태완은 12.12 사태 진상조사위를 통해 공개증언에 나서며, 진실 알리기에 나섰으며, 군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12.12사태에 대한 역사적 판단 이전에 사법적 처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2000년 민주당에 입성하여 국회의원 배지를 달게 됩니다. 그는 정계 은퇴 이후, 쿠데타를 막지 못한 한을 풀고자 동서고금의 쿠데타 자료와 쿠데타를 막는 국가 시스템 연구에 매진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2008년 폐암 수술을 받은 뒤 건강상태가 나타져 투병생활을 하다가, 2010년에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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