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페루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마추픽추(Machu Picchu)에 대해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금일 페루 문화부에서는 성명을 내고 사회적 상황과 방문객들의 안전을 위해, 잉카 트레일과 마추픽추의 폐쇄를 명령했다'라고 밝혔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페루의 옛 잉카제국의 유적지인 마추픽추는 '늙은 봉우리'라는 뜻으로 약 2,437m 에 위치한 고산도시로서, 1400년대 후반에 지어진 마추픽추는 약 80여 년 동안 사람들이 거주하다가, 1530년대쯤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파차쿠티 황제가 군사원정 도중에 마추픽추를 황실 휴식처 겸 긴급 대피소 등의 목적으로 지었을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도시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을 때에는 약 75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스페인에서 남미를 발견하고 1530년대쯤 천연두가 확산되었을 때에 잉카제국이 쇠퇴하면서, 마추픽추도 함께 사라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제리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라는 책을 보게 되면, 남미가 스페인한테 정복당한 이유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169명이 잉카제국의 8만 대군을 제패한 원인을 바로 균(병균)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동물의 가축화로 소, 돼지, 말, 개 등의 동물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었던 스페인사람들은 총과 갑옷(쇠)을 가지고 있었으며, 남미의 페루에 상륙했을 때에는 동물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던 페루 원주민들은 바이러스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으며, 천연두라고 불리는 바이러스로 인해 잉카 제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스페인에게 점령당하기 전까지 마추픽추는 돌과 석재를 쌓아 올려 만든 대표 건축물로는 해시계와 태양의 신전 그리고 세 창문의 방 등이 있었으며, 마추픽추는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고 있으며,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1530년대쯤 천연두의 확산으로 인해 잉카문명이 사라지게 된 이후 약 380년 후인 1911년 미국의 학자인 '하이렁 빙엄'이 원주민 소년의 증언을 토대로 실체를 확인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산을 깎아 만든 계단을 통해 방문을 할 수밖에 없었으나, 관광지로 개발된 이후에는 셔틀버스로 쉽게 방문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마추픽추의 발견자인 하이럼 빙엄은 미국 예일대 교수였으며, 페루 산티아고에서 열린 학회를 참석하고 페루의 잉카제국의 유적지들을 답사하던 중에, 잉카 문명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한 원주민 농부로부터 고대 도시의 이야기를 듣고 그 가족들 중 꼬마 아이의 안내에 따라 올라간 곳에서 마추픽추를 발견한 후, 학회에 공식적으로 보고하게 되었습니다.
빙엄은 1912년 예일대학과 내셔널 지오그래픽 그리고 페루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마추픽추를 재방문했으며, 4개월 동안 머무르며 마추픽추 유적들을 정리하고 그 일부를 미국의 연구실로 보냈는데, 초기만해도 빙엄을 호의적으로 보던 페루 정부도 빙엄이 마추픽추의 유물들을 미국으로 가져가게 되자, 페루의 언론들도 미국인들이 페루의 보물을 훔쳐가고 있다고 기사를 쓰게 되면서 언론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빙엄이 예일대학으로 가져간 유물은 무려 5만여점에 달했으며, 유물 74개 상자와 46,000여 점이었으며, 그 후 문화재 환수 목소리가 커지자 384점만 반환한 적이 있으며, 2011년 발견 100주년을 기념하여 반출한 유물 중 6백 점을 페루 측에 반환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국외소재 문화재재단에 따르면, 미국이 보관 중인 한국 문화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고려불화 등 43,558점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마추픽추에 머물렀던 잉카인들은 계단식 농경지에서 감자와 옥수수 등을 길러 먹었으며, 산 아래의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아와 먹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라마나 알파카 등의 동물을 이용하여 해발 2,400m에서 짐을 옮기기도 했으며, 이 동물들을 도축하여 먹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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